
"그건 그냥 카드일 뿐이야, 로사."
"그치만..."
입술을 삐죽 내민 사랑스러운 아이의 탐스러운 검은색 곱슬머리를 보듬어 주었다. 조금씩 들리는 얼굴이 이내 활짝
웃는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사이 얽히는 그 따뜻한 것에 기쁨을 얻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라파엘은 로사의 동그란
이마에 키스하며, 언제나 하는 맹세를 한번 더 읊었다.
라파엘의 사랑스러운 여동생 로사는 최근 오컬트에 빠져있었다. 마을 외곽에 산다는 뱀파이어의 소문이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은 것은 아니리라. 라파엘은 저 너머 겨우 보이는 옛 성의 첨탑을 노려보다가, 다시 다정한 오빠가 되어 로사의 작은 손을 잡았다. 안에서 양피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르는 척 했다. 옆집의 샌디가 몇년 전 가지고
놀았다던 타로카드를 물려받은 로사가 각 카드의 의미가 해석된 양피지까지 물려받은 것이다. 그게 언제적 건데,
지금쯤이면 의미가 바뀌고도 남지 않았겠어?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고, 라파엘은 자신이 뽑은 카드를 내려다
보았다. 척 봐도 불운해 보이는 카드는 남자 하나가 거꾸로 매달린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죽은 듯이 창백한,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그 카드의 뜻을 살펴보던 로사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고, 라파엘은 조심히 눈알을 굴리며 쪼그려 앉았다. 로사와 눈을 맞추기 위함이었으나 로사는 자신을 쳐다보지 못한다. 시선을 돌려 작은 손에 쥐어진 양피지의 뒷면을 유심히 살폈다.
샌디의 악필은 마을에서 유명했기에 얇은 양피지 뒤로 비친 글씨들을 해석하는 데에 작지 않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라파엘은 분명히 보았다. 사형수, 고난, 시련... 뭐 그런 안 좋은 말들이 아주 지저분한 글씨로 쓰여져 있었다. '로사가
몇 살인지 알긴 해? 이런 흉흉한 물건을 주면 어쩌자는 거야?' 그렇게 쏘아 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샌디는 없었다.
없어졌다. 그래서 라파엘은 자신의 손가락을 탓하기로 했다. '좀 더 좋은 카드를 뽑아줄 수도 있었잖아!' 그리곤 옆구리에 꼈던 성경으로 카드를 덮어버렸다. 로사의 작은 어깨를 번쩍 안아든다.
"꺅!"
일부러 끄응, 하는 소리를 낸 것에 대한 불만인지 로사가 라파엘의 어깨를 주먹으로 탕탕 내리쳤다. 라파엘은 죽는 소리를 냈다. "아파, 아프다구." 그러면서도 팔을 단단히 죄어 안았다. 곧 주먹세례가 멈춘다. 걱정스러움을 잔뜩 담은 작은
고동색 눈동자를 라파엘은 지긋이 바라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주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라파엘은 슬퍼하지
않으려 했다.
"샌디가 돌아오면 한번 더 배우자. 응?"
라파엘의 빙긋 웃는 얼굴에 겨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로사의 작은 얼굴에서는 불안이 떠나지 않는다. 라파엘이 빠르게 덧붙였다.
"그렇지만 역시, 카드놀이를 하기엔 너무 많이 커버리신 것 아니십니까? 공주님?"
"아니거든!"
퍽. 이번엔 정말 아프게 라파엘의 가슴팍을 때리곤, 휙 하니 품에서 벗어나는 로사 때문에 라파엘은 휘청거린다.
그래도 동생이 다칠세라 손을 뻗는다.
그러나 잡을 수가 없었다. 작은 걸음으로 빨리도 앞을 향해 나아간 여동생은 용케 넘어지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고
머얼리 혼자 뛰쳐나가버린다. 순식간에 멀어져 사라진 잔상에 잔뜩 허우적거리기만 하던 하얀 손을 꽉 쥐며, 라파엘은
눈을 떴다. 간만에 꾼 나쁜 꿈에 잘 나지 않는 땀이 온 몸을 적시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었다. 라파엘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는 호흡이 필요 없는 죽은 몸이었으니 사실상 폐부에 공기를 넣은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것은 버릇같은 것이었다. 라파엘은 의식적으로 호흡했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흉부를 부풀리고, 배를 부풀리기도 하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뭔가 진득한 것들이 라파엘을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니가 서 있을 방향이 그곳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를 거꾸로 매달아버릴 것처럼.
라파엘은 한번 몸을 가볍게 털었다. 짙은 고동색의 나이트가운이 어깨의 선을 따라 차르르 미끄러져 떨어진다. 꿈의 연장 때문인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인지, 라파엘은 그걸 잡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어두운 실크 덩어리를
지나 벽 한면을 차지하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그림 앞에 섰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하루에도 여러 번 누르는 조합을 눌러, 그림 뒤에 숨겨진 혈액팩들 앞에서 고민을 한다. 혈액형별 분류는 물론 맥주를 마시는, 완전 육식주의자, 건강등급 등의 분류까지 되어있는 붉은 창고 앞에 서 있던 나신의 뱀파이어는 잠시간 그의 고동색 눈동자에 그 광경을 담았다. 빨갛게
뿌예진 눈동자에 초점은 없다. 그래도 그 웅덩이에 손을 뻗어 결국 하나를 집어낸다.
오늘은 맥주를 마시는 A형 먼데인의 피다.
약 50여년동안 크고 작은 부침들이 있었지만, 라파엘은 그것을 고민이나 문제라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더 큰 절망의 구렁텅이로 자신을 끄집어내준 것이 화려한 파티광 날라리라는 것도, 그에 대한 회한으로
절은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은 초록색이고 싶어하는 뿔 달린 괴짜라는 것도, 클랜의 장으로서 모셨던 자신의
원수는 자식을 500이나 만든 아름다운 저주덩어리라는 것도… 전부 길가에 핀 꽃인 듯, 불 켜진 가로등인 듯 지나쳐왔다. 뭔가에 집중하면 안 된다. 집중한다는 것을 다른 존재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라파엘은 천천히 음미하던 혈액팩을 버리고 성호를 그었다.
익숙한 것인데도 입이 쓰다. 지나온 꽃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몇번이고 피었고, 어떤 가로등의 불은 깜빡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입 안에 진하게 남은 피의 냄새에 라파엘은 더 이상 흥분하지 않는다. 라파엘은 검은색 벨벳 스웨이드 재질의 소파에 몸을 묻고 입 안에서 혀를 움직였다. 입천장과 혀에 공기를 가두었다, 풀었다 하면서 똑딱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리곤 일어나 시간을 확인했다. 정오. 거의 모든 뱀파이어들이 잠들어 있을 시간.
라파엘은 허리를 곧추세워 바로 서서, 한번 더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는 미끄러지듯이 걸음을 옮긴다. 아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존재였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옷장에서 검기만한 쓰리피스 수트를 꺼내 몸에 걸치고,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유리병을 품에 갈무리해 넣었다. 안에 든 액체의 찰랑거림이 가슴께로 느껴진다. 라파엘은 다시 걸었다.
아주 천천히, 걷고 걸었다. 방을 나와서 복도를 지나고 반쯤 끊긴 계단을 뛰어내려,
한낮에도 어둡기만 한 지하로, 아래로.
밑으로 향할수록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머리통을 소리의 진동으로 날려버리려는 것처럼 쉴새없이 이어지는
괴소음은 라파엘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커져만 간다. 그는 늘어지는 것처럼, 미끄러지는 것이 아니라 떠밀리는 것처럼
걸었다. 그럼에도 끔찍한 소리는 점점 더 크고 괴로워져만 간다. 한번 더 성호를 긋는다.
"Falta mucho tiempo."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혼잣말을 하면서, 자신에게조차 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라파엘은 계속해서 십자를
그리는 것 밖에 할 수가 없다. 살아있을 때 보다 더 많이, 지금까지 그었던 것보다 더 절박하게.
죄책감은 귀를 막으려는 노력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끔찍한 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다. 쇳소리가 섞여 악을 쓰는 비명 뒤로 소리만큼 끔찍한 냄새가 난다. 지하실 벽에 새로 낸 창문의 나무틀에 발린 띠너의 냄새, 그를 통해 들어올 따뜻한 볕의 냄새, 그에 타들어가는 뱀파이어의 살 냄새,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분노라는 감정의 냄새. 언제나 생생한 오십년 전 즈음의 기억처럼, 라파엘은
'그녀'의 고통을 아주 생생하게 전달받고 있었다. 혀뿌리가 타들어 갈 것 같아도 신의 이름을 입에 담았던 때의 고통,
십자가로 얼룩진 흉터들의 작열감,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과 절망……
그러나 그것들은 과거의 기억과 감각을 상기한 것뿐이며, 매일 같은 고통을 반복하는 것은 자신의 실험체이자 데이라이터의 자손, 하이디였다. 라파엘은 한번 더 자신을 저주했다.
부디, 신이시여.
이제는 저를 벌하지조차 않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