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로 고대부터 살았어요? 고대에 태어난 거에요? 언제?"
하이디는 너무나 귀찮고 귀찮으며 귀찮은데다 귀찮기까지 한 아이였다. 갓 뱀파이어가 된 밤의 아이들은 으레 모든 것을 주체하지 못하곤 했지만 하이디는 특히나 더 카밀을 성가시게 만들었다. 대답해줄 필요가 없는 질문은 소음일 뿐이다.
그 질문에 호기심과 질투와 열망 그 외 덕지덕지 많은 것들이 붙어있다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카밀은 라파엘처럼
무르지도, 사이먼처럼 멍청하지도 않다. 그녀에겐 하이디가 필요했다. 카밀은 생글 웃었다. 마주보는 하이디의 표정을
따라한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신의 탄생을 기억하는 존재란 없어, 아가새야. 그치만... 맞아. 내 삶의 기억에 고대가 있지. 삶의 시작에 탄생이 있으니 고대에 태어났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하?"
하이디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는 빙글빙글 눈알을 돌리다가 탁자 위에 장식된 고리장식이 화려한 골드램프를 들어올렸다.
"그래서 이런 걸 좋아하시는구나!"
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니 참 편리한 뇌를 가졌군. 별 의미도 없는 말만 내뱉었던 카밀은 자신의 아름다운 손가락을 길게 뻗어 램프의 고리에 끼워넣었다. 하이디는 어깨를 으쓱하며 순순히 램프를 내어준다.
"아니. 그냥 예뻐서 좋아하는 거야."
조심히 램프를 들어올린 손가락에는 검은색 네일이 매끄럽게 발려져 있었다. 인조손톱이라고 착각 될 정도로 잘 정돈된 길다란 손톱은 카밀의 자랑이었다. 스냅으로 마법을 부리는 전 애인은 부러워하면서도 몇번 해보고는 매번 손톱을 부러뜨려 먹는 통에 하지 못하는, 부러움의 대상. 그리고 카밀은 그런 자신의 자랑을 보면서 릴리스를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보낸 파이어메세지에서 뚝뚝 떨어지던 새카만 감정덩어리들을. 그 끈적거리는 릴리스의 편린이 닿는 것보다는 하루살이 불나방...이 아닌 아가새와 왈츠라도 춰주는 편이 더 낫지.
카밀은 살짝, 아주 작은 소리도 나지 않게 램프를 내려놓았다. 램프의 아름다운 고리장식은 그레이터 데몬의 뿔과 꼭 닮은 뿔을 가진 소 두마리가 머리를 맞댄 장엄한 것으로, 소의 눈에 박힌 프린세스컷 천연 사각 루비는 카밀이 아끼던 목걸이를 줄이고 남은 것을 박아넣은 것이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루비의 붉은 빛이 검은 손톱에 잠시 비쳐졌다 사라진다. 카밀은 짜증을 숨기고 입매를 끌어당겼다. 멍청해보일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하이디의 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턱선이 도드라지는 얼굴을 지나, 목을 스쳐 턱 끝까지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녀의 손톱에는 어느새 루비의 빛과 같았던 붉은 핏방울이 맺혀있다. 그러나 하이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글 웃는 얼굴이 더 환해진다. 카밀은 드디어 하이디에게서 딱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냈다.
"너도 예쁜 편이지."
"네?!"
하이디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절 좋아하세요?"
그리곤 성큼, 빠르게 얼굴을 붙여온다. 뱀파이어에게 있어 모든 현상과 동작은 무한으로 쪼개져 비춰지곤 했기에 그녀의 '빠르게'는 카밀에게 빠른 것이 아니었지만, 그녀를 당황하도록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하이디의 비명같은 물음과 함께 카밀의 길다란 손톱 끝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튕겨져나간 조각이 하이디의 광대께를 질주했는지, 역시 또 빨간 자욱이 남는다. 그러나 역시 또 다시, 하이디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그런 아픔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그저 자신에 대한 긍정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모습에서 카밀은 울렁거림을 느꼈다. 대충 전해들었던 자신의 자식, 데이라이터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그 애를 후려치고 싶어졌다. 카밀은 핏방울이 맺힌 자신의 검지를 내려다보며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녀는 우는 것을 싫어했다. '우는 것 보다는 웃는 게 낫지.' 이 말을 했을 때에, 카밀의 전 애인들은 하나같이 '먼데인, 그것도 늙고 이상한 먼데인 같은 소리를 한다'고들 평했다. 그것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기분 나빠해도 될 이야기들. 그래서 카밀은 기꺼이 한번 더 기분 나빠하며 얼굴을 구겼다.
"가게에서 발견했다면 샀을 거야."
그리고 피가 나는 손으로 하이디의 얼굴을 잡고,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붉은 입술 주름 사이사이에 하이디의 피가 스며든다. 고대에 태어나 지금 여기까지 이어지는. 카밀의 귓가에 환청같은 웃음소리가 걸린다. 하이디는 웃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쭈욱. 아주 예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