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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부정당하며, 피하고 싶은 것으로 받는다. 모든 끝이란 공포심을 주기 마련이다. 당연한 

순서일 상황에도 무언가가 끝난다는 걸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도 태반이었고, 그건 네필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클레리 페어차일드는 네필림들에게 죽음과 같은 존재였다. 수십 년을 살아온 방식은 분명히 변화해야 할 때를

맞이했다. 언제까지도 다른 존재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하지만 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편하게 누릴 수 있는 우월성이 이미 끝나가는 것도, 제압하는 방식 또한 이제 바꿔야 한다는 사실도.

“그렇게까지 해서 지켜야 하는 이유가 뭐죠?”

그렇기에 그들은 끝없이 싹을 잘라내었다. 변화의 씨앗으로 보이는 이들은 미리 억압하고 주입하여 싹을 틔우지 못하게 막으며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내고자 했다. 많은 동료를 잃어도 그들에게 탓하면 그만이었기에, 그다지 어려운 일 또한

아니었다. 그런 그들에게 도래한 문제가 바로 클레리였다. 그녀는 정식으로 네필림이 아니면서 누구보다도 네필림에

가까웠다. 섀도우 헌터의 세계와 떨어져서 먼데인 속에서 살아가며 배워 가지고 있는 윤리와 가치관은 극히 이 세계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떤 이들보다 뚜렷한 천사의 피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던 새로운 권능이 억지로 주입한 피로 얻어졌다는 건 우스운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그러한 그녀의 피라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클레리 페어차일드. 경거망동한 행동은 삼가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존중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강한 클레리라고 한들 두렵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이라면 또 모를까. 그들이 클레리의 무력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뚜렷한 명분조차 없었고, 애초에 명분이 있다고

한들 그녀는 직접 억울한 존재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람이 아닌 이상, 쉽게 죽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역사상 최강이자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전사를 죽인 것 역시 그녀이기는 했다만 반대로 그렇기에 그녀에게 명분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제가 두려워할 이유는 없군요.”

그렇기에 그들은 오히려 클레리의 행동에 웃을 수 있었다. 더없이 비열한 웃음이나 다름없다. 놓친 줄 알았던 그들만의

권위가 여전히 강한 전사의 목줄을 잡아 여전히 놓치지 않았다는 확신에 의한 웃음이었으니까.

눈앞에 있는 상대의 심경은 관심도 없는 그 감정에 클레리는 분노하기보다는 기가 찼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인다고 한들 그들을 해할 생각은 없는 건 사실이었다. 하는 행동들은 분명히 잘못되었고, 생각마저 바꿔야 하는 게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일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어디까지나 생각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굳이 걸어온 것이었다.

쉽게 바꿀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아예 단단한 벽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천사의 피를 받아서 세상을 지킨다는, 고결하기 짝이 없는 명분을 내세웠으면서도 차별조차 허물지 못하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조금도 생각을 바꿀 수 없어 미안해하기는커녕 그래도 자신이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비소를 흘리는 모습에 무엇을 더 말해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조금도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으신가요?”


“없습니다. 나가주시죠.”

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은 이어졌고, 손짓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치 귀찮은 일이라도 되는 양, 성의 없는 그 손짓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클레리는 이내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을 빠져나갔다. 조금 전까지 감정을 터트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집정관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렇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 외에도 부정하거나 반항하는 존재는 여태까지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부정하던

다운월더나 네필림이나 그들의 권위에 무릎을 꿇었으니까. 클레리 한 명 더해진다고 해서 특이할 것도 없었으니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건 기만이었다. 누구보다도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 핏줄이나 눈빛이나 말 몇 마디에 달라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구석으로 밀어내었다.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변화는 결국 죽음이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에, 애써 눈을 돌리며 부정하고 외면했다.

커다란 죽음이 그리고 새 시작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XIII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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