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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밤, 그날은 밤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언뜻 느껴지는 바람의 냄새로 미루어 짐작건대, 가을의 언저리를 벗어나는 계절인 것 같았다. 얼마만의 바깥공기인지, 숨을 들이쉴 적마다 폐가 새로이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다. 앨린, 앨린을

찾아야만 했다. 악마 같은, 아니 악마가 앨린을 노리고 있다. 앨린에 관해 물었으니 너무도 당연한 순서였다. 
시배스천은 비좁은 창고에 갇혀 며칠을, 몇 주를, 몇 달을 보냈다. 그가 거처를 옮기면 따라 옮겨야 했고,

소중한 가족들과 친구들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하면 그가 원하는 정보를 주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가족들이, 친구들이 죽었을 테니까.
저 멀리, 공원을 거니는 앨린과 또 다른 섀도우헌터가 보였다. 몇 발자국만 더 다가가면, 잠긴 목을 가다듬고 소리치기만 하면 된다. ‘앨린!’ 입을 벙긋거리며 목소리를 돋우려는 순간이었다. 입을 틀어막는 우악스러운 손, 등허리를 가르고 꽂히는 날카로운 금속의 느낌. 시배스천은 생각했다. ‘나는 이제 죽는구나. 속아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실패작이야.’

***

시배스천 벌락, 그는 똑똑한 섀도우헌터였다. 그는 끈기 있고, 동시에 포기가 빠른 이였다. 모순 같겠지만, 시배스천을

아는 사람들이 그를 설명할 때, 이 두 가지 모두가 성립됐다는 점을 참작하면 어쨌든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시배스천은 자기가 잘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끝을 봐야 하는 성미였고, 그렇지 않은 것은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할 줄 알았다. 그가 파리에서 데몬 연구를 전공하고, 일찍이 전장에서 한 발자국 멀어지게 된 것도 그 탓이었다. 잡을 수 있는 것에 손을 뻗어 빠르게 취하는 것, 가능성 없는 데에 목을 매지 않는 것. 이 두 가지는 그의 특기이자 장기였다. 
시배스천에게는 몇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첫째는 그가 지나치게 호기심이 많다는 점이었다. 호기심은 고양이에게만

해로운 게 아니었다. 학구열과 호기심은 한끗차이라는 것을 시배스천은 알지 못했다. 둘째는 그가 너무 오랫동안 모험을 동경해왔다는 것이었다. 시배스천을 아는 이들은 시배스천이 지나치게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좀처럼 밖으로

나가지 않고 책에만 파묻혀 있었으니까. 몇몇은 그를 두고 현실을 볼 줄 모른다고 했다. 시배스천을 정말로 잘 아는, 앨린 같은 사람들은 그의 그런 면이 시배스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거라며 종종 경고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를 염려했다.
시배스천은 엔젤릭 룬을 받던 어린 시절부터,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완벽한 지식과

이론으로 무의미한 희생과 죽음을 막을 수 있다는 믿음. 이는 시배스천을 도서관에 묶어두었고, 책더미에 파묻혀 배움을 멈추지 않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가 호전적인 네필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배스천은 타고난 전사도 아니었고, 애초에 싸움이나

폭력 따위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소위 말하는 정적인 학자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시배스천은 데몬을 공부하고

그 지식으로 전술을 짜는 데에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이는 런던 기지의 네필림들에게는 동료를 잃는 슬픔을 덜 겪게

했으며, 시배스천에게는 보람을 느끼게 했다. 그는 자신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었다.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생활이 즐거웠다.
시배스천은 언제나처럼 도서관의 책들을 과식하듯 읽어나가고 있었다. 호기심은 종종 그를 금서들의 서고로 이끌었다. 클레이브나 도서관 측에서도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배스천의 성품과 이제까지의 업적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가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섀도우헌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눈감아주는 경우가 잦았다.

앨린이 시배스천과의 약속을 깨지 않았더라면, 시배스천이 취소된 약속 시간을 때우기 위해 도서관의 보존서고로

향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언젠가 섀도우헌터 아카데미의 강단에 섰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시배스천의 끝은 그렇게 될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은 강단도 아니었고, 가족들의 품도 아니었다. 차가운 공원바닥의 보도블록 위였다. 
보존서고 가장 구석 책장 맨 아래, 마치 다른 세계에서부터 실수로 흘러들어온 것 같은 그 구닥다리 책을 꺼내 들지만

않았더라면, 그 책이 시배스천의 모험심에 불을 지피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두고두고 후회했던 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배스천이 우연히 발견한 그 책은 제목조차 알 수 없이 낡은 데다가 제대로 된 표지가 있기는

했을지 의심스러운 몰골이었다. 도서관의 정령이라는 별명을 가진 시배스천의 눈에도 낯선 그 책은 데몬과 관련된 아주 오래된 가설을 정리한 책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책이라기보다는 종이 뭉텅이를 묶어놓은 것에 불과했지만, 데몬을

교화할 수 있다는 가설은 시배스천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시배스천은 데몬들 각각에게 고유한 습성이 있다는 점을 이용해 최대한 인도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처리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섣불리 데몬들을 위한 인도적 절차의 필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가는 클레이브의

눈총을 받을 게 뻔했다. 책의 가설대로 데몬을 교화할 수 있다면 애초에 섀도우헌터들이 전장에 나갈 이유가 없을 것이고, 젊고 용맹한 섀도우헌터들의 희생이나 죽음 따위의 슬픈 일들은 일어나지도 않을 터였다. 
시배스천의 시선을 끈 대목은 훈련을 통해 작고 약한 데몬들의 공격성을 죽일 수 있었다는 실험 결과였다. 이름을 알리지 않은 저자는 그레이터데몬을 상대로 실험을 하는 것은 클레이브의 법을 최소 마흔 개는 어기는 것이었기에 실험을

계속할 수 없었다는 말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내용으로 보나, 보존서고에 처박혀있는 것으로 보나,

사적으로 대출할 수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책 어디에도 표지나 청구기호나 도서관 소유의 책이라는 것을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해 볼 만 한 모험이었다. 시배스천은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을 비비며 종이 뭉텅이에 가까운 책을 챙겨 도서관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시배스천은 작고 아늑한 로프트에 돌아와 종이뭉치를 펴놓고 자기가 가진 데몬 데이터와 비교하면서 그 가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가늠해보았다.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지나가듯 들었던 나이 든 교수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그레이터데몬 연구를 하려면 클레이브에 보고되지 않은 데몬들을 직접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그 교수는 그레이터데몬 연구를 위해 서재를 떠나 모험으로 스스로를 내던진 거의 최초의 네필림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그런 이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목숨을 잃지 않고 스스로의 업적을 후대에 가르칠 수 있는 섀도우헌터로는 최초였다.

그의 오른팔은 철의 자매들의 도움으로 만든 의수였는데, 시배스천은 그의 팔을 보며 진정한 연구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이라고 생각했다.
섀도우월드에서 섀도우헌터가 이름을 남길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발렌타인처럼 악명을 떨치는 것을 제외하고,

전사의 길을 택하지 않은 시배스천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더욱더 그랬다. 클레이브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지 않은 그레이터데몬을 찾아 종이뭉치의 가설을 입증해내는 것. 그 정도 업적이라면 시배스천은 지성과 지식이 섀도우헌터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찼다. 보고된 적 없는 데몬을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섀도우월드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큰 일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데몬을 이용해 데몬과의 전쟁을

완전히 종식한다면, 섀도우월드의 평화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날 이후 시배스천은 목격된 기록만 남은 그레이터데몬을 찾는 데에 시간을 할애했다. 폭력과 피를 좋아하는 데몬을

상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시배스천에게 무리가 컸기에 가장 먼저 제외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그레이터데몬 무리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이돔에서부터 직접 소환해야 하는 데몬들. 시배스천은 고민에 빠졌다. 데몬을 소환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월록의 도움 없이 데몬을 소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분명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고, 설령 월록의 도움을 받아 데몬을 소환한다 해도 그들이 비밀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켜줄 수 있는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이미 시배스천의 모험심과 도전정신에 불씨가 당겨진 지는 오래였다. 시배스천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무의식 어딘가에서는 언제까지고 이론과 글자, 실험, 가설의 숲만 헤맬 수는 없다는

생각이 싹트고 있었다.
시배스천은 그레이터데몬을 소환할 방법을 찾아 백방으로 헤맸지만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도 많았다.

룬을 박탈당할 수도 있고, 소환한 그레이터데몬이 섀도우월드를 장악해버리는 불상사가 벌어진다면 수많은 동료들과

가족들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시배스천은 간절한 마음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의 생을 통틀어 가장 괴로운 일주일 하고 며칠이었다.
그 밤, 문제의 그 밤. 시배스천은 도서관에서 몰래 빼온 종이뭉치 같은 그 책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도서관이든 클레이브든 알리칸테든, 애초에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없어졌다는 것을 알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책 하나 때문에 무시무시한 생각을 했던 스스로가 두려웠다. 혹시라도 자기 외에도 누군가가 그 책을 보고 같은 생각을, 어쩌면 더 끔찍하고 대범한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그 책을

태워버리리라 다짐하면서 시배스천은 거의 열흘 만에 처음으로 깊은 잠에 빠졌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시배스천은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잠을 깼다. 창밖은 아직도 달이 밝았다. 목소리는

도저히 산 사람의 것으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다정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것은 계속해서 시배스천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성가시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급한 용무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단잠을 깨워 미안하다는 투였다. 시배스천은 자꾸만 내려앉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침대 헤드에 기댄 채로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졸린 눈을 비볐다. 달빛을 등지고 선 ‘그것’은 마치 타고 남은 장작 같았다.

푸르스름한 어둠 속의 그것은 시배스천의 침대 발치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한쪽 팔에 끼고 있었다. 시배스천의 본능이 그의 책상 옆의 쓰레기통으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간밤에 처박아버린 종이뭉치가 그 안에 있어야 하는데, 쓰레기통은 비어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은 사색이 된 시배스천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들고 있는 책을 조심히 시배스천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시배스천은 별안간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놀랍게도 그것에는 눈이 있었다.

“뭐, 뭐야!”


“…….”


“손에 든 그거, 내려놔. 내 거야.”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목소리에는 온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분명히 귓가에 닿아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꿈속에서 울리는 음파 같았다. 시배스천은 자기가 병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이 넘게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으로 끙끙거리느라 입맛도 똑 떨어졌었으니까. 
시배스천의 몸속 세포 하나하나가 그에게 경고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시배스천은 그 신호를 어느 정도 무시한 채로

머릿속에 빼곡하게 채워둔 데몬들의 목록을 이리저리 넘겨보며 눈앞의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답답함과 고통스러움, 두려움이 한 데에 엉켜 시배스천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침대 발치에 서 있던 그것은 시배스천의

침대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손에 쥐고 있던 책은 시배스천의 무릎 위에 얹은 채로 가만히 눈을 맞추며

사이의 거리를 좁혀왔다. 시배스천은 무의식적으로 침대 헤드로 뒤가 막힌 것을 알면서도 몸을 뒤로 뺐다.

“꽤 깜찍한 생각을 했던 것 같던데. 요 조그마한 머리통으로.”


“…….”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걸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찾아왔지.”


“무슨 소리야?”

그것은 시커먼 팔을 뻗어 시배스천의 무릎 위에 얹어둔 책을 가리켰다. 시배스천의 모든 신경이 날카롭게 반응하며

절규하다시피 도망치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마지막 경고라고, 지금이 아니면 이제 절대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

어쩌면 이미 늦었을 거라고.

“이 책을 읽었지?”


“읽었지.”


“어땠어? 난 별로던데. 우습고, 위선적이더라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네가 지난 얼마간 그레이터데몬을 찾아다녔다는 걸 알아.”


“난, 나는... 데몬 연구에 관심이 많으니까, 그건 당연한 거야.”


“솔직하지 않네.”


“…….”


“네가 찾던 그레이터데몬이 지금 네 앞에 있다면, 어떻게 할 거지? 붙잡아서 온순한 애완동물로 만드는 실험을 할 건가? 아니면 포기할 거야?”


“설마, 설마 네가...”


“그레이터데몬을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 어떤지 들어보고 싶은데, 시배스천. 덮어놓고 네 실험용 쥐가 돼주겠다는 건 아니야. 일종의 거래를 하자는 거지. 나랑 너랑, 둘이서. 네게 원하는 게 있거든. 너도 나한테 원하는 게 있는 것 같고.”


“그건 클레이브 규칙 위반이야, 나는 룬을 박탈당할 거고...”


“약한 소리 하지 마. 사실은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아? 몸이 근질근질하지? 평생 책벌레 시배스천이라는 소리만 들으며 사는 데에는 질렸잖아. 난 너 같은 놈들을 좀 알아. 명예를 얻고 싶잖아, 동료들을 위한다는 건 다 핑계고...”


“…….”


“도와줄게, 나랑 같이 가자.”


“……. 어젯밤에 쓰레기통에 처박았어, 그런 생각은.”


“내가 다시 꺼내서 네 눈앞에 가져다줬잖아. 손만 뻗으면 잡힐 텐데.”

그의 말에 시배스천의 푸른 눈동자가 얕게 고동쳤다. 그레이터데몬을 찾아 실험하는 게 미친 짓이라는 것을 머리로

알게 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 책을 가져온 날 밤, 바로 그 날 답이 나온 문제였다. 그만두기로 마음먹기까지는 일주일이 넘게 걸렸지만. 스스로를 그레이터데몬이라 하는 ‘그것’은 시배스천의 마음에 여전히 희미하게 남겨진 모험을 향한 열망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너는 몸만 빌려주면 돼. 말이 좀 그런가? 어쨌든 네가 다치는 일은 없어. 내가 너인 척 돌아다니기로 한 날, 너는 얌전히 집에만 있으면 되는 거야.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네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시배스천 벌락이 두 명씩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까.”


“잠깐, 내 이름은 어떻게…….”

시배스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핏기가 없었다. 시커멓게 불길에 그을리다 못해 타버린 것 같은 모습 안에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그대로 굳어버린 얼굴이 있었다. 슬프다기보다는 억울하고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것은 절대로

언성을 높이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처음과 다를 바 없이 차분하고 담담했다.

“너희 네필림들이 아는 것보다 우리들은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지. 시배스천, 너는 꽤 똑똑한 줄 알았는데, 조금 실망할 뻔했어. 혹시 몰라서 말해두는데, 네 이름을 알아내는 건, 너희들이 손목에 새긴 룬을 스텔레로 덧그리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해두지.”


“네가 그레이터데몬이라면, 이름이 뭔지 말해봐. 못 믿겠으니까.”


“의심은 호기심의 다른 이름이지.”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이름이나 말해!”


“조나단, 지옥의 여왕인 릴리스가 나를 기른 어머니다.”


“내 몸을 가지고는 뭘 할 건데. 릴리스 정도면 네게 몸뚱이 하나쯤은 거뜬히 내어줄 텐데.”


“어머니는 내가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도 탐탁지 않아 하셨어. 그리고 내가 하려는 일은 너희 섀도우헌터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야. 발렌타인을 없애는 것.”


“그건, 그건 불가능해. 그보다 왜?”


“복수? 뭐 그 비슷한 거. 더는 묻지 않는 게 좋을걸, 시배스천.”


“발렌타인을 죽이고 나면, 그다음엔 뭘 할 건데?”


“내 누이도 만나야겠어. 그리고 그다음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지.”


“내가 원하는 대로 너한테 실험을 해도 된다는 거지?”

 

“얼마든지.”

 

“…….”
“네 소중한 육신이 다칠 일은 없어, 내가 약속하지. 다치게 할 마음 없대도.”


“굳이 나한테 이런 거래를 제안하는 이유는?”


“글쎄, 네 얼굴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조나단은 섀도우헌터의 몸이 필요했다. 그를 길러준 어머니는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끝없이 부어주었다. 그 방식이

조나단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았지만, 조나단에게 강력한 능력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조나단은 더는 어머니의

곁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를 버린 어미와 아비를 찾아 복수하고, 하나뿐인 진짜 가족인 누이를 찾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갈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지상에서부터 느껴지는, 똑똑하지만 적당히 지혜롭지는 못한 어느 네필림의 냄새는 조나단으로 하여금 이돔을 떠나도록 부추겼다. 약점을 파고들어 실수하게 만드는 것은 조나단의 재주였다. 간절한 마음만큼 약점이 되기 쉬운 것은 없었다. 어떤 감정이든 깊어지면 눈을 멀게 하고 이성을 무르게 만든다. 뻔히 잘못될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가능성과 유능함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데에 눈이 멀어 판단력이 흐려진 그 네필림은 실로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배스천.”


“……. 됐어.”


“그래, 그럼 뭐.”

시배스천은 조나단의 제안에 쉽게 응할 수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할까, 데몬들도 그런 말을 들어줄까.

시배스천이 복잡한 얼굴로 눈을 데록데록 굴리자 조나단은 인내심이 바닥난 듯 시배스천의 무릎 위에 올려둔 책을 낚아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배스천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 조나단은 시배스천을 향해 단 한 순간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대로 거래는 끝이다. 시배스천은 아마 다시 책더미에 파묻히게 될 것이고, 운이 없다면 영영 모험 그 비슷한 것도 해볼 수 없을 것이며, 더욱더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섀도우헌터 아카데미의 강단에조차 서보지 못하고 그저 그런 삶을 살다가 적당한 때에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런 삶은 왠지 싫었다.

그렇게 살려고 이렇게까지 열심히 공부를 한 게 아니었다.

“잠깐만.”

시배스천의 마지막 남은 이성은 소리쳤다. 그러지 말라고, 저 데몬이 떠나게 두라고.

“기다려, 할게. 할 거야.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시배스천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숨도 조금은 가쁜 듯했고, 손바닥에는 긴장으로 땀이 고여있었다. 조나단은

시배스천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이미 시배스천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다.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얼굴,

푸른 눈동자, 탐스럽게 물결치는 금빛 머리칼. 무엇으로 보나 시배스천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미 늦었어.” 


“뭐?”


“사실 네 대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거든. 예의 좀 차려본 거야. 네필림들은 예의를 꽤 중요하게 여긴다고 들었거든. 앞으로 우리 즐겁게 지내보자, 시배스천.

XVIII The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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