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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VI The Tower

소녀의 성

“너를 이해한다. 내가 밉겠지.”


그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자벨은 어머니의 말을 질문으로 바꾸어 곱씹어본다. 내가 당신을 미워하냐고?

지금도, 그때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듯이 미워하냐고? 아니면 이미 포기했느냐고?

월록이 천천히 돌이 되어 가는 것처럼 당신을 향한 마음은 이미 단단히 굳어진 것은 아니냐고?

* * *

 

소녀가 되는 상상을 한다. 이자벨은 가만히 누워 그런 생각을 한다. 
상상 속의 여자애는 아직 키도 작고 깡말랐다.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살고 싶지 않은지는

잘 아는 여자애. 그 애는 눈썹이 부리부리하고 눈도 부리부리하다. 천사의 후예로 태어나서 그 애는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하고 싶지는 않다. 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 애는 아주 커다란 곳에 산다. 그곳에는 악마도 있고 천사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와 같은 애들이 아주 많다.

그곳은 성과 같은 곳이고 그곳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없다. 이자벨 라이트우드는 자신은 그곳을 밝히는 횃불이 되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그는 횃불보다는 깜부기 불이다. 불똥이다. 제대로 타오르지 못하는, 혹은 탔던 흔적만 있는,

아무것도 아닌, 깡마르고 멍청하고 책임 따위는 모르는 여자애. (‘너는 왜 이것 밖에 못하니?’)
소녀가 되는 상상을 한다. 이번에는 이자벨 라이트우드가 아니다. 그 소녀는 이자벨 자신처럼 키가 작고 깡말랐지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다. 곁에 불 그 자체인 사람이 있고, 늘 불 가에 있으며 함께 타오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여자애다. 그 애는 이자벨처럼 눈썹이 부리부리하고 눈도 부리부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안에는 그 애의 눈썹이나

눈이나 손아귀나 어디서든 새어 나오는 불꽃을 가졌다. 이자벨 라이트우드와는 아주 다른 여자애다.

그 애는 아주 커다란 곳에 살았고 악마도 있고 천사도 있고 그와 같은 애들이 아주 많은 곳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되어 보였던 여자애다. 이자벨 라이트우드가 아니다. (‘안다. 내게 실망했겠지. 나는 실패했어. 그래서 너를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 여자애는 실패를, 아주 처참하고 고통스럽고 그녀의 삶 대부분을 자신이 불태운 재 위에서 헛된 성을 쌓아야 하는

실패를 앞두고 있다.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명패는 불타오른다. 그것은 이자벨 라이트우드가 아니다.

그러나 이자벨 라이트우드는 그 여자애의 실패를 자신의 실패라고 배우면서 살았다. 알든 모르든. 아마 그것은 두 사람

중에 이자벨 라이트우드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애에게만 해당하는 일일 지도 모른다. 라이트우드는 횃불이 되어야

하는데, 재를 태우는 업을 맡았고 그것은 이자벨의 실패다. 그 애는 자신의 아이를 그렇게 가르쳤다.
이자벨 라이트우드는 돌아누워서 다시 소녀가 되는 상상을 한다. 
상상 속의 소녀는 작고 깡말랐지만 불꽃을 숨길 줄은 아는 아이다. 이자벨은 그렇게 살고 싶었다. 자신 안에 불꽃을 가진 사람들은 남들의 불꽃에 몸이 타지 않는다. 라이트우드는 그래야 했다. 그들의 성을 꾸미고 있는 수많은 성화는 그런

불꽃을 나눠주는 천사들과 그 불꽃을 잉태할 수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천사들이 하는 일은 그런 것이다.

인간에게 불꽃을 전해주거나, 그 불꽃으로 인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천사의 피를 타고난 이자벨 라이트우드가

하는 일은 그런 것이다. 자신이 아닌 남들 안에 있는 불꽃을 보고 괴로워하는 것,

혹은 가졌다고 생각했던 불꽃이 너무도 작고 여린 것을 애써 외면하는 것.
불쌍한 애. 이자벨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시 돌아누웠다. 불쌍한 애는 자신이다.

자신보다 더 불쌍한 것은 매리스 라이트우드다. 하지만 그 불쌍한 매리스는 이자벨 라이트우드를 그렇게 길렀다.

(‘누가 더 불쌍한지 묻고 싶니?’) 이자벨은 한참을 뒤척인다. 어쩌면 그 누구도 불쌍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불꽃이 있고 이자벨은 아주 작은 깜부기 불이나마 자신이 오른 탑 위에 올려두고 와야만 한다. 어떤 천사들이,

혹은 천사를 간절히 원하는 영혼들이 아주 작은 불꽃에도 위안을 얻도록.

혹은 아주 끔찍한 선택을 했던 소녀가 길러내야 할 어떤 소녀를 위해서라도.
엄마, 하고 이자벨 라이트우드는 목소리를 내본다. 그 울림은 그렇게 좋았던 기억이 없는데,

더 이상 소녀라고 말할 수 없는 여자는 어머니를 끌어안은 순간 그 부드럽고도 단단한 신체 안에서 자신과 같은 소녀를

찾는다. 그 여자애는 거기에 있었다. 자신과 똑같이 작고 깡말랐었다. 그 여자애는 자신이 선택한 미래를 그렇게

잘 감당하지는 못했다. 탑 안에 있는 그 여자애. 그 여자애.

(‘어쩌면 엄마랑 나는 그냥 그 탑에 불을 질렀어야 해요. 명예가 다 뭐라고?’)


“엄마가 날 이렇게 길렀어요.”

목소리로 내고 보니 그 말은 너무도 연약하다. 작고 악착같은 여자애는 자신을 기른 소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괴롭다. 어떤 소녀들은 그렇게 길러진다. 어머니 안에 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도록, 연민하도록, 그리고 똑같이 그 탑을 올라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스스로 비추면서도 끝내 부채감을 버릴 수 없도록. 그것은 이제 소녀 안에 있는 불꽃이 되었다. 그것은 불똥이지만 끝까지 그를 따라올 것이다. 악의와 오기로 가득 차 있는 탑을 내려가겠다고 생각했지만

발밑을 보면 아직도 바닥에 닿기까지는 영원의 시간이 걸릴 것만 같다. (‘우리는 탑을 태웠어야만 했는데.’)
소녀는 돌아누웠다. 꿈을 꾸면 자신과 닮은 소녀를 볼 것이다. 그들은 탑을 불태우지 못했고 그저 자신을 불태울 뿐일

테지만 기꺼이 그럴 것이다. 라이트우드의 여자는 그렇게 길러지는 것을, 그의 탓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언젠가

그 탑에서 떨어질 때가 오면, 그것은 전락이 아니라 샛별이 되는 것일 테니 두려워하지는 말자고,

그 애의 손을 잡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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