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ever leave you alone
엉망으로 깨지고 부수어진 세상을 바라보다 매그너스 베인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땅에 처음으로
도착했던, 이제는 아주 희미하게 먼 아득한 그 때를 가까스로 떠올렸다.
모든 것이 검고 붉게 불타버린 땅 위에는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았다. 크고 검은 날개를 가진 악마들은 마른 하늘을
배회했고, 빛을 잃은 하늘 위에는 해도 달도 별도 들지 않았다.
어린 아이는 난생 처음 보는 지옥의 풍경에 아버지의 큰 손을 말없이 꼭 쥐었다.
'마음에 들더냐?'
'......'
아이는 조그만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윽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와 꼭 같은 노란색 눈동자가 번뜩였고, 그 모습에
아비 되는 이는 소리 없이 웃고선 그의 아이의 손을 쥔 채 자신의 땅에 지팡이를 디뎠다.
저 멀리서 높게 날던 것들은 이제 부자의 머리 위에서 낮게 날았다.
살아있는 존재는 절대 낼 수 없는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그들의 귀환을 축하하는 것처럼.
워록은 다시 눈을 뜨고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남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의 피뭍은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평상시 그의 손을 장식하고 있던 화려한 문양의 굵은 반지들은 온데간데 없이 단 하나의 반지만 그의 손가락에 자리하고 있었고, 항상 가지각색의 색으로 칠해져 있던 메니큐어도 자취를 감춘 채였다. 단지 머리 위에 가지런하게 올려진 흰색
베일이 어디선가 불어온 푸른 바람에 승전기처럼 나부낄 뿐이었다.
"알렉산더."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평소에 로프트 바깥으로 나가기 싫다며 오 분만, 아니 삼 분만이라도 더 있겠다며
난데없는 투정을 부리면서 저를 품 안에 꼭 껴안을 때 그는 연인을 이렇게 불렀다. 그러면 연인은 대답 대신 아침 햇볕에 푸르게 반사되는 녹음을 닮은 눈으로 저를 바라봐 주었다. 그게 다정하고 부끄러워, 매그너스는 그의 팔을 말없이
만졌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따뜻하게 젖은 한숨을 몇 번이고 내쉬곤 했다.
"......"
그러나 그는 이제 그런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다. 굳게 닫힌 긴 속눈썹이 다시 열릴 일도, 붉은 피 한 줄기 흐르는 입에서 제 이름이 불릴 일도 다신 없을 것이다. 뺨을 계속 어루만지던 그의 손길이 수천 번도 더 만지고 더듬었던 연인의 얼굴과 몸 위를 정처 없이 배회한다. 곧게 뻗은 콧날, 베일 듯한 광대, 항상 제 입 안을 열렬하고 거칠게 탐하던 입술,
쉼 없이 움직이던 두껍고 긴 목까지.
마지막으로 한 때 그의 것이었던 화살이 박혀있는 가슴에 닿아서야 손의 움직임이 멎었다.
일반적인 먼데인과 네필림들은 다르다. 그들은 훨씬 빠른 회복력을, 그들을 능가하는 운동 신경을 가진 존재들이며
그에 걸맞은 의무를 지기 위해 태어난 전사의 후예들이다. 매그너스는 가끔 그의 옆에 누워 잠든 알렉의 판판한 가슴에
귀를 대곤 했었다. 빠르게 펄떡이는 고동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뛰지 않는 제 가슴조차 덩달아 뛰고 있는 것만 같아서
매그너스는 그 순간을 사랑해 마지하지 않았다. 연인은 살아 있었고, 그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자신 또한 살 수 있었다.
그것은 불가분의 관계였으며, 필연적이고도 운명적이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귀를 가져다 대는 대신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으며, 추억과는 다르게 그 위로는 아무런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 멈춰버린 시간을 움직여 내고야 말았던 사람의 시간은 이제 다시 흐르지 못한다. 세계는 끝났으며, 그가 한 때 가졌던 희망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연인의 심장에 화살이 박힌 그 순간 이후, 그의 멈춰버린 심장을 대변하듯 그의 눈에는 눈물 한 방울 맺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연인을 품고 걸어온 모든 길 위의 존재들은 소멸했고 비존재들은 먼지로 스러졌다.
가장 강한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최악의 슬픔이자 최후의 예우였다.
"알렉산더, 내 사랑."
매그너스가 중얼거리자, 알렉이 흘린 피처럼 붉은 장미 꽃잎들이 그의 몸 위에 내려앉아 보란듯이 떨어졌다.
"이렇게까지 너를 사랑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그의 뒤에 있던 교회당이 큰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스테인드글라스에 금이 가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멸망한 세상을 다시 한 번 찢었으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가운 연인의 몸을 여즉 따뜻한 손으로 살살 쓸었다. 그가 살아있었을 때보다 더욱, 다정한 손길로.
"정말이야, 이렇게까지 너를, 사랑할 생각은."
손의 움직임을 따라 장미 꽃잎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없었는데."